성남 약사사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 삼존(지장보살, 도명존자, 무독귀왕)을 중심으로 십왕(十王)을 비롯하여 판관·사자·옥졸·장군 등의 권속을 배치한 불화로서, 1880년 경기도 고양군의 화양사(현 서울 광진구 영화사로 91)의 중단탱으로 봉안되었던 불화이다.
성남 약사사 지장시왕도에서처럼 병풍을 배경으로 하여 지장삼존을 중심으로 주변에 여러 단으로 권속들을 배치하고 시왕이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 등의 구성은 서울 경기지역에서 성행한 지장시왕도 형식 중 하나이다.
아울러 우두・마두신(牛頭・馬頭神)과 십왕이 들고 있는 홀 등에 강조하고자 하는 문양 등에 호분(胡粉)을 쌓아 올려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고분법(高粉法)이 시행되어 있는 점도 18세기 이후의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불화 하단의 붉은색 종이에 적혀 있는 화기(畵記)에는 당시 궁궐의 상궁등의 시주로 봉안될 수 있었다는 흥미로운 기록이 실려있으며 다른 불화 화기에서는 아직껏 찾아 볼 수 없었던 화승의 소임을 책임 수화승인 ‘어화편수(魚畵片手)’, 표구 담당 화승인 ‘장회(莊繪)’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 당시 불화승 소임에 대한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 또한 크다.
성남 봉국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은 경기도 성남시 영장산에 있는 오래된 사찰인 봉국사의 대광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1호)에 관음보살, 지장보살과 함께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높이가 112cm인 중·대형 불상이며, 결가부좌(結跏趺坐) 하고 손 모양은 통인(通印)을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나발(螺髮)이 있고, 정수리에는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肉髻)가 있다. 이마 위에는 반원형의 중앙 계주(髻珠)가, 정수리 부위에는 낮은 원기둥 모양의 정상 계주가 장식되어 있다. 네모난 얼굴에 가늘게 뜬 눈, 원기둥 형태의 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입은 17세기 전반 불상의 전형적인 인상과 같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완만한 곡선으로 새겨져 있어 1600년부터 1630년대에 제작된 불상의 표현과 유사하다. 불상의 얼굴에 비하여 신체가 크지만 얼굴과 신체 비율은 인체의 비율보다 균형 잡혀 있다.
불상은 대의(大衣) 안쪽에 편삼(褊衫)을 입고 있으며, 오른쪽 어깨의 옷자락이 가슴까지 수직으로 늘어져 옆으로 펼쳐져 있다. 또한 나머지 대의 자락은 팔꿈치와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 있고, 하반신을 덮은 대의 자락은 복부에서 수직으로 늘어져 있으며 끝부분은 역삼각형 모양이다. 불상의 옆면은 한 가닥의 옷 주름이 어깨선을 따라 수직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불상 뒷면의 목둘레에는 대의 끝단이 둘러져 있고, 왼쪽 어깨에는 앞에서 넘어온 옷자락이 대좌 위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가슴을 덮은 승각기(僧却崎)는 수평으로 묶여 있으며 윗부분은 연꽃잎 모양으로 접혀 있다.
불상의 안쪽에 조성 발원문을 비롯한 복장 유물이 없어 불상이 만들어진 시기와 작가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으나 불상의 양식적인 특징으로 볼 때 17세기 전반에 활동한 조각승 수연이나 그 계보를 잇는 조각승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성남 봉국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은 시대성, 희귀성, 예술성, 보존 상태의 측면에서 조선 후기 불교 조각사 연구에 대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6년 7월 22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09호로 지정되었다.
성남 봉국사 아미타불회도는 현재 주불전인 대광명전의 후불도(後佛圖)로 걸려 있다. 화기(畵記)에 따르면 1873년에 삼각산 흥천사에서 제작하여 영장산 봉국사에 모셔진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가로 216.5cmm, 세로 176cm이며 가장자리는 흰색과 청색으로 꾸몄다. 이처럼 주불전 후불도가 가로로 길어지고 가장자리를 청색으로 마감하는 방식은 19세기 후반 불화의 특징이다.
불화의 중앙에는 설법인(說法印)의 손 모양을 한 아미타불이 불단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여래 좌우로 6위의 보살이 있다. 이 중 존명을 알 수 있는 보살은 민머리에 육환장(六環杖)을 든 지장보살뿐이며, 그 외에는 존상의 형상이 명확하지 않아 존명을 단언하기 어렵다. 이처럼 불화에서 주존 혹은 협시 보살의 모습이 모호해지는 경향은 19세기 불화의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경우 화기는 봉안 위치와 의례적 용도만을 의미하는 상단탱으로 기록되며, 이 아미타불회도 역시 화기에 상단탱이라 기록되어 있다. 한편, 아미타불의 광배(光背) 뒤로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있으며, 그 옆으로 10대 제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경전을 보거나 호랑이와 과일을 들고 있다. 불화의 상단 및 하단에는 부처를 수호하는 호법신, 즉 검, 비파, 용과 여의주, 탑과 당을 든 사천왕과 사자관, 코끼리관을 쓴 야차와 건달바가 있다. 여래와 나한은 얼굴이 타원형이고, 눈을 가늘게 떴으며 코가 길고 입은 작은데, 이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 서울·경기권에서 유행하던 화풍이다. 이에 반해 보살과 사천왕 등은 얼굴이 둥글고 눈이 커서 19세기 후반의 화풍도 나타난다. 즉, 봉국사 아미타불회도는 19세기 전반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1870년부터 새롭게 선호되었던 화풍을 수용하고 있으므로 19세기 경기 지역에서 유행하였던 화풍이 공존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주존인 아미타불의 신광(身光)에는 금색이 칠해져 있어 화려하며, 불화의 주된 색인 붉은색과 녹색이 각 존상의 광배와 의복에 칠해져 있다. 또 19세기 후반에 모든 불화에 사용되었던 채도와 명도가 높은 청색, 소위 코발트블루가 사용되었으며 보조색으로 황토색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황토색 바탕에 흰 연꽃이 그려진 탁의(卓衣)에는 당시의 대표적인 표현 기법이 나타난다.
이 불화는 화승 덕운긍윤이 책임을 맡아 제작한 유일한 불화로서 화면 구성이 안정되고 존상 묘사가 뛰어나며 세부 묘사가 정교하여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경기도 불화 중에서도 수준이 높다. 또한 독특한 인물 묘사 및 색채 사용 등에서 19세기 후반 경기 지방의 지역색이 드러난다.
이처럼 봉국사 아미타불회도는 19세기 후반 경기도에서 제작된 불화 중 구성 및 표현 등이 우수하여 시대성, 희귀성, 예술성, 보존 상태의 측면에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6년 7월 22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10호로 지정되었다.
매듭장이란 끈목(多繒)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종류의 매듭을 짓고, 술을 만드는 기술 또는 그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끈목은 여러 가닥의 실을 합해서 3가닥 이상의 끈을 짜는 것을 말하는데, 그 종류에는 둘레가 둥근 끈으로 노리개나 주머니 끈에 주로 쓰이는 동다회와 넓고 납작한 끈으로 허리띠에 자주 사용되는 광다회가 있다. 복식이나 의식도구 장식으로 사용되는 매듭은 ‘격답’·‘결자’라고 한다.
매듭의 기원은 원시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 전승되어 오는 장식과 실용으로 삼았던 고유의 매듭 기법이나 염색법은 삼국시대에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소속의 매듭장이 있었다. 재료로는 명주실, 모시실, 닥나무실, 삼베실, 털실 등이 쓰인다. 끈의 색감, 굵기, 맺는 방법에 따라 형태가 다양하며 지방에 따라 그 이름도 다르다. 매듭의 이름은 생쪽, 나비, 잠자리, 국화 등 우리가 쉽게 보고 사용하는 온갖 물건, 꽃, 곤충에서 따왔다. 끈이나 매듭의 하단에 다는 것을 술이라 하는데 각종 악기, 교통용구, 불교 도구 등의 장식에 사용하였다. 술 또한 쓰임새에 따라 딸기술, 봉술, 호패술, 선추 등 다양하다. 같은 종류일지라도 궁중과 지방에 따라 그 품격이 달랐다.
산조란 장구반주에 맞추어 다른 악기를 독주형태로 연주하는 것을 말하며, 4∼6개의 악장을 구분하여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 순서로 연주한다.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산조를 가야금산조라 하고, 직접 가야금을 타면서 노래하는 것을 가야금병창이라 한다. 모든 산조는 느린 장단으로 시작하여 차츰 빠른 장단으로 바뀌는데, 이는 듣는 사람을 서서히 긴장시키며 흥겨움을 끌어올리게 한다. 다른 악기의 산조에 비해 가야금산조는 가야금의 악기적인 특성으로 인해 여러 명인들이 다양한 음악유파를 형성할 수 있었다. 가야금병창은 단가나 판소리 중 한 대목을 따다가 가야금반주를 얹어 부른다. 가야금병창은 원래 가야금산조의 명인들이 불렀지만, 오늘날에는 산조와 병창의 연주자가 분리되는 추세이다. 원곡이 따로 있는 노래를 병창으로 부를 때에는 가야금 특유의 선율로 인해 본래의 곡과 다른 맛이 나고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게 된다. 판소리 흥부가 중 “제비노정기”, 춘향가 중 “사랑가”, 수궁가 중 “고고천변”, 심청가 중 “심봉사 황성가는 대목”은 가야금병창의 유명한 대목이다.
가야금산조 및 병창은 전통음악 중에서 순수한 음악미를 추구하는 독주곡으로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태평무는 나라의 풍년과 태평성대를 기리는 내용을 춤으로 표현한 것이다.
경기지역 무속에서 비롯된 춤과 음악을 바탕으로 고(故) 한성준 등 예인들이 예술적으로 재구성하여 전승되고 있다.
남녀가 왕과 왕비의 복장을 하여 궁중풍의 웅장하고 화려함을 보여 주며, 춤장단은 진쇠, 낙궁, 터벌림, 도살풀이 등으로 다른 춤장단에 비해 구성이 복잡하고 까다롭다. 장단의 변화와 함께 겹걸음, 잔걸음, 무릎들어 걷기, 뒷꿈치 꺾기 등 디딤새의 기교가 현란하면서도 조급하지 않은 절제미를 보여준다.
동작이 섬세하고 우아하며 동작 하나하나에 절도가 있으며, 다양한 발 디딤과 기교가 멋으로 꼽힌다.
나전칠기가 언제부터 한국인의 생활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중국의 역사서에 보면 한(漢)대에 칠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낙랑고분에서 칠기가 출토되고, 신라의 관직제도에 칠전(漆廛)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다고 추정된다. 고려시대 이후 나전칠기의 독자적인 기법으로 발전 전승되어 한때는 세계적인 기술을 자랑할 만큼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고려 인종(仁宗) 때 서긍(徐兢)이 저술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 나전칠기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 기법은 매우 세밀하여 귀하게 여길 만하다.”고 전한다.
나전칠기에 대한 문양도 시대적으로 구분되는데, 조선 초인 15~16세기의 나전의장은 연당초문, 쌍봉문, 쌍용문, 보상화문 등 고려시대의 섬세함에 탈피하여 표현이 대담하며 활달하였고, 17~18세기경에는 기법이 다소 쇠퇴하면서 점차 매죽, 화조 등의 그림이 두드러지고 사군자나 십장생 등 문인화풍의 문양이 성행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자연을 소재로 한 풍경화적인 묘사에 중점을 두어 십장생과 산수문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현재 수많은 나전장들이 그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대목은 원래 궁궐이나 사찰, 가옥과 같은 것을 맡아 짓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 중 조선시대 도편수(혹은 도대목)의 경우는 이와 관련한 일을 총괄하여 지을 집의 법식을 정하고 일의 분담과 기법을 지도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건축가에 견줄 수 있는 격조 높은 장인에 속한다. 도편수의 소임은 통나무가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도편수는 통나무를 점검하여 그 크기와 생김새에 따라 분류하는데, 이 중에는 자귀질만으로 다듬어지는 것이 있고 인거장(引鋸匠)에게 넘겨 각재(角材)나 판재(板材)로 켜내는 것도 있다. 이들 각재나 판재는 대목들의 소용 재목이 되며, 또한 살대 등을 깎는 소목들에게 돌아간다.
도제 방식에 의하여 건축 현장에서 양성되었던 대목은 고금의 뛰어난 건물에 대한 지식은 물론, 제도술과 암기 능력을 갖추어야만 했다. 곧 먹줄 튀기는 일은 우리 건축의 법식과 기법에 통달하여야 했던 것이다.
현재 도무형문화재 대목장·도편수인 장효순은 전통 건축물을 복원, 신축하는 일을 전승하여 발전시키고 있다.
봉국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말사(末寺)로 영장산(靈長山) 서남쪽 기슭에 위치한다. 1028(현종 19)년에 창건하였으며, 그 뒤 폐허가 된 것을 1395(태조 4)년 태조의 명에 의해 담화(曇華)가 중수하였다. 1674(현종 15)년에는 현종(顯宗, 1659∼1674)의 딸 명혜(明惠)와 명선(明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공주의 능 인근에 있던 이 절을 중창하게 하였는데, 당시의 역사를 맡은 승려는 금강산의 일축존자(日竺尊者)였으며 중창 후 ‘봉국사’라고 명명하였다. 1924년 두창(斗昌)이 중수하였고, 1932년에는 주지 춘성(春城)이 서울 삼청동에 이 절의 부속암자를 만들었다. 그 뒤 퇴락하여 폐허가 된 것을 1958년에 비구니 법운(法雲)이 중수하였고, 1967년에는 혜성(慧星)이 삼성각을 신축하였으며, 1969년 4월에는 요사채를 신축하였다. 1974년 완전 해체하여 복원하였다.
대광명전은 주존불(主尊佛)로 목조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좌우협시 보살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신 불전이다. 경내에 남향하여 정면3칸, 측면3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풍판(風板)이 있으며 건물에 비해 지붕이 커, 그 외관이 장중하다. 자연석 기단에 놓인 고복형(鼓腹形) 초석 위에 민흘림기둥이 세워져 공포가 결구되고 오량(五樑)의 지붕가구가 올려져있다. 장식은 쇠서의 형태, 연봉 및 봉황 조각 등 18세기 말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원래의 지붕은 측면의 공포배열과 귀공포 형태로 미루어 팔작 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 좌우에는 사자를 닮은 서수(瑞獸)가 있어 특이하다. 이 불전은 기단과 초석, 지붕 등 많은 부분이 수리되었으나, 조선후기의 불전형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망경암 마애여래좌상은 망경암 우측의 자연 암벽 상단에 작은 장방형의 감실(龕室)을 만들고 그 안에 부조(浮彫)한 불상으로, 이 주위 14군데에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서울이 한 눈에 보이는 이곳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임금이 친히 거동하여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기원한 장소이며, 세종의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平原大君, 1427~1445)과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 1466~1525)의 명복을 빌기 위해 칠성단(七星壇)을 세워 칠성제를 지내면서 ‘칠성대(七星臺)’라 불렸다. 불상 주변에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1897(광무 1)년에 이규승(李圭承)이 관음상을 새기고 절을 세웠다고 전한다.
망경암 마애여래좌상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좌상으로 양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를 입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머리는 민머리를 하고 있는데 얼굴 모습은 마모가 심하여 그 정확한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마애여래좌상 우측과 아래로는 암벽을 평평하게 다듬은 후 14곳에 얕은 감실을 파고, 그 안에 ‘大皇帝陛下萬萬歲(대황제폐하만만세)’ 등의 명문을 새겨놓았다.
망경암 마애여래좌상은 조형미나 조각 기법이 그다지 우수하지는 않지만,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조선 후기 불상 중 하나이며, 또한 당시의 칠성 신앙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담당부서 : 교육문화체육국 > 문화예술과 > 종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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