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내동 가옥은 분당 신도시 개발 이전, 이곳에 세거하였던 한산이씨(韓山李氏)의 살림집 중 한 채로 이택구가 거주하였던 집이다.
과거 수내동 지역은 선산 안쪽에 약 70호 가량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 중 한산이씨는 30여 호 가량 되는 집성촌이었다.
현재는 분당지구 개발로 인하여 철거되고 이 집만 남았다.
이 가옥의 정확한 건립 연대 및 연혁은 파악할 수 없으나 이 가옥에 살았던 이택구씨의 증조부가 이곳으로 이사한 후 4대째 거주한 것으로 미루어 대략 150-200년 전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집 주위에는 마을 어귀에 있던 큰 느티나무와 연못, 정자터 등이 보존되어 있다.
집의 형태는 바깥마당에 면한 一자형 행랑채와 ㄱ자형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고 안채 뒤로는 널찍한 뒷마당이 흙담에 둘러싸여 있다.
전체적으로는 튼 口자형을 이루는 전형적인 중부지방형의 배치 구조이다.
안채는 10칸 규모의 초가로서 건넌방과 대청, 안방이 일렬로 배치되고 안방 앞쪽에 꺾이어 부엌과 광이 1칸씩 있다.
낮은 기단 위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오량(五梁)의 지붕가구를 짜 올렸는데 부재가 비교적 견실하며 치목(治木)도 반듯하여 19세기 말의 건물로 추정된다.
문간채는 6칸 규모의 우진각 초가인데 중앙에 대문이 있고 오른쪽에 온돌방이 위치하고 있다.
이는 조선 후기 경기지역 살림집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
* 휴무일 : 매주월요일
분당구 율동 도랫말에 관찰사 한혜(韓惠, 1403~1431)의 아들 문정공 한계희(韓繼禧, 1423~1482)의 후손이 최초로 정착하였다.
한계희의 묘를 분당저수지 위쪽에 쓰고 이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받고 그 후손이 세거하면서 ‘한씨촌’을 형성하였다.
한계희는 조선 초 기내훈구파에 속하는 유학자로 시호는 문정이다.
우승지, 좌승지, 공조참판, 이조참판, 이조판서, 좌찬성을 역임하였고 특히 세조의 신임을 받았다.
최항 등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447(성종 8)년 『의방유취(醫方類聚)』 간행을 주관하였다.
그는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한사문(韓士文, 1446~1507)은 시호는 공간이며 대사헌, 병조참판, 공조참판, 공조판서,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서천군에 봉해졌고, 한사무(韓士武, 1452~1482)는 한성판관, 한사신(韓士信)은 삼등현령, 한사개(韓士介, 1453~1521)는 시호가 영흥이며 영흥부사와 해주, 광주, 진주 등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한사무의 아들 한승원(韓承元)은 정선군수, 한승형(韓承亨)은 성주목사, 한승정(韓承貞)은 대사간, 한승인(韓承仁)은 호군, 한승의(韓承義)는 처사였다.
분당구 율동에는 주로 한사신의 차남 도정공 한석(韓碩, 1479~?)의 후손이 많은데, 한석은 훈련원도정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아들 한인원(韓仁源)은 동북현감, 한예원(韓禮源)은 감찰, 한지원(韓智源)은 교리를 역임하였다.
한지원의 아들 한술(韓術)은 참판, 한회(韓懷)는 승지였다.
충성공파 후손인 한순흠(韓淳欽, 1933~)의 19대조로 호조참의와 승정원 부정자를 지낸 한욱(韓勖)의 장남 한귀영(韓貴榮)은 어모장군, 차남 한귀익(韓貴益)은 용양위부사가 되고, 한귀익의 아들 한진선(韓振善)은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한계희 신도비의 건립 연대는 1483(성종 14)년으로 조선 초의 전형적 양식으로 화관석, 비신, 기대로 이루어져있다.
화관석과 비신이 하나의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으며, 규모는 화관석 72X23X52cm이고 비신 61×18×152cm, 기대 115×59×44cm이다.
신도비문은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찬하고 안침(安琛, 1445~1515)이 전과 글씨를 썼다.
한사문의 신도비는 총고 231㎝의 규모로 기대의 하부 전‧후면에는 각각 구획을 나누고 그 안에는 안상문을, 상부에는 연당초문을 조각하였다.
1508(중종 3)년에 세웠으며 신용개(申用漑, 1463∼1519)가 찬하였고 신흠(申欽, 1566∼1628)이 전과 글씨를 썼다. 한사개의 신도비 총고는 206.5㎝이고 전면에는 운문, 상단 중앙부에는 초승달이 조각되어 있는데 신도비에 해와 달이 조각된 경우는 드물다.
김안로(金安老, 1481~1537)가 찬 하였으며 1521(중종 16)년에 건립하였다.
풍산군(豊山君) 이종린(李宗麟, 1538~1611)은 중종(中宗)의 손자이며 덕양군(德陽君) 이기(李岐, 1524~1581)의 장남이다.
1581년 덕양군이 돌아가자 관례에 따라 정경(正卿)의 품계에 올랐으며, 임진왜란 당시 어가(御駕)를 호종하였다.
1607년 종1품 가덕대부(嘉德大夫)에 제수되고 1610년에는 소덕대부(昭德大夫)에 올라 왕실 종친부의 일을 관장하였고 사옹원제조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였다.
일반 사대부의 봉분이 통상 열두 폭의 병풍석을 두르고 문인석에 오량관(五粱冠)을 씌운 반면, 풍산군의 봉분은 큰 받침돌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팔 폭의 병풍석을 둘렀으며 문인석에도 칠량관(七粱冠)을 씌우는 등 왕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왕의 예에 따라 매장한 특징이 있어, 2005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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