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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향토문화재 / 정일당강씨 묘
    시향토문화재/정일당강씨 묘 이미지
    • 지정번호 : 시향토문화재 제1호
    • 지정일자 : 1986. 3. 4.
    • 명칭 : 정일당강씨묘
    • 소재지 :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산75
    • 소유자 : 파평윤씨 단제공파 대종회

    정일당 강씨(靜一堂 姜氏, 1772~1832)는 조선 후기의 여류문인으로, 출신은 제천, 본관은 진주, 호는 정일당(靜一堂)이다.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강재수(姜在洙)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이며 권서응(權瑞應)의 딸이다. 1791(정조 15)년 20세에 윤광연(尹光演)에게 출가한 뒤 집이 가난하여 바느질로 생계를 이으면서도 남편을 도와 함께 공부하였다. 경서에 두루 능통하였으며, 시문에 뛰어나 당시에 문명이 높았다. 또한 글씨에도 능하여 홍의영(洪儀永), 권복인(權復仁), 황운조(黃運祚) 등의 필법을 이어받았는데, 특히 해서(楷書)를 잘 썼다. 이직보(李直輔, 1738~1811)가 그의 시 한수를 보고 매우 칭찬하였는데, 이 소문을 듣고는 저술을 일체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저서로는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 1책과 시문집 1책 등이 있다.
    묘소는 금토동 청계산(淸溪山) 기슭에 부군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묘비 하나 없이 전해오던 것을 성남시에서 1986년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하고, 2000년 2월 파평윤씨 문중의 협조를 받아 묘역 및 사당을 재조성하였다. 현재 청계산 기슭에 남향하여 있는 원형의 봉분은 기다란 용미와 활개를 갖추고 있다. 묘역에는 아무런 석물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 단출한 느낌이며, 묘역 입구의 입간판을 통해 묘주를 확인할 수 있다.

    시향토문화재 / 송산 조견 선생묘
    시향토문화재/송산 조견 선생묘 이미지
    • 지정번호 : 시향토문화재 제3호
    • 지정일자 : 2001. 2. 20.
    • 명칭 : 송산 조견 선생 묘
    • 소재지 :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 산30
    • 소유자 : 평양조씨 송산공 종회

    조견(趙狷, 1351~1425)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종견(從犬), 호는 송산(松山)이고, 초휘(初諱)는 윤(胤)이다. 정숙공(貞肅公) 조인규(趙仁規, 1227~1308)의 증손이자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덕유(趙德裕, 1314~1352)의 아들이며, 영의정 조준(趙浚, 1346~1405)의 동생이다. 한때 승려였으나 환속하여 1371(공민왕 20)년 문과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영남안렴사(嶺南按廉使)를 지냈다. 조준(趙浚, 1346~1405)과 함께 이성계(李成桂)를 추대, 조선을 건국한 후 개국공신으로서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다. 1394년 경상도도절제사, 1397년 지중추원사, 1403년 좌군도총제가 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하여졌다. 1411(태종 11)년 평성군(平城君)으로 개봉(改封)된 후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421(세종 3)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진하사(進賀使)와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조견의 묘역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유행대로 3단의 계체석(階砌石) 구조를 갖춘 방형(方形) 봉분(높이 180cm)이며, 이와 함께 상석, 문인석, 장명등의 옛 석물이 진설되어 있다. 봉분 하단에는 사각호석을 마련하였으며, 주위의 좌·우·후 3면에는 90㎝의 간격을 두고 60∼110㎝ 높이의 축대를 쌓아 활개를 대신하고 있으며, 봉분 양측에는 높이 54X35X100㎝의 석주를 세웠다. 또한 곡장(曲墻)의 기단 및 장방형(長方形) 주초석(높이 102㎝)이 남아 있다. 2단의 묘정(墓庭)에 상석(높이 28㎝)과 문인석, 3단의 묘정에 장명등을 두었다. 봉분 좌우에 세워져 있는 안두(按頭)의 문인석(文人石)은 좌가 높이 148㎝의 3등신의 신체 비율이며 좌측 귀가 파손되어 있다. 복두공복(幞頭公服)을 착용하고 있으며, 얼굴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몸집이 상체에서 하체로 내려갈수록 가늘어지는 양식상의 특징이 있다. 또 장명등(높이 76㎝)은 개석(蓋石)이 없어지고 화사석(火舍石)의 상부가 훼손된 상태이다.
    조선 초에 관직을 제수한 기록과 조선 중기 고려조의 충신으로 인정받은 기록이 있어 행적에 대한 이견이 있으나, 본 묘역은 여말선초의 사대부 묘제를 나타내는 유적이자 인근 묘역(자손묘)을 통해 고려 및 조선시대의 묘제를 함께 조망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시향토문화재 / 금릉 남공철 묘역
    시향토문화재/금릉 남공철 묘역 이미지
    • 지정번호 : 시향토문화재 제4호
    • 지정일자 : 2002. 12. 16.
    • 명칭 : 금릉 남공철 묘역
    • 소재지 :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산66
    • 소유자 : 의령남씨 충경공파 종회
    • 안내사항 : 방문 불가

    금릉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은 조선 후기 정치가·문장가이며,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思穎)·금릉(金陵)이다. 남한기(南漢記)의 손자이며, 대제학 남유용(南有容)의 아들이다. 모친은 김석태(金錫泰)의 딸이다.
    1780(정조 4)년 초시에 입격한 후, 1784년 부친이 정조의 사부(師傅)였던 관계로 음보(蔭補)로 세마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산청과 임실의 현감을 지냈다. 1792년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홍문관부교리, 규장각직각에 임명되어 『규장전운(奎章全韻)』의 편찬에 참여하면서 정조의 지극한 우대를 받았다. 또한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임되었으며, 김조순(金祖淳), 심상규(沈象奎)와 함께 패관문체를 일신하려는 정조의 문체반정에 동참했다. 정조 때에는 주로 대사성에 있으면서 후진교육 문제에 전념했다. 순조 즉위 뒤 『정조실록(正祖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조판서, 대제학을 역임했다. 1807(순조 7)년에는 동지정사로서 연경에 다녀왔고, 1817년에 우의정에 임명된 뒤 14년 간 재상을 역임하였고, 183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평소 김상임(金相任), 성대중(成大中), 이덕무(李德懋)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독서를 좋아했고, 경전의 뜻에 통달했다. 구양수(歐陽修)의 문장을 순정(淳正)한 법도라 하여 가장 존중했고, 많은 금석문·비갈을 남긴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다. 서예사의 '전사자체(全史字體)'의 창안자이기도 하다. 순조, 익종의 『열성어제(列聖御製)』를 편수하였고, 저서로는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이 있다. 시문집으로는 『귀은당집(歸恩堂集)』, 『금릉집(金陵集)』, 『영옹속고(穎翁續藁)』, 『영옹재속고(穎翁再續藁)』, 『영은문집(瀛隱文集)』 등이 있다.
    묘역은 수정구 금토동에 있는데, 봉분 및 석물은 옛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원형의 봉분은 용미와 활개가 없고, 지위에도 불구하고 문인석과 신도비를 갖추지 않아 검소하다. 특히 비석은 당나라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집자하여 제작한 것으로 금석학에 귀중한 자료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시향토문화재 / 경헌 조몽정 묘역
    시향토문화재/경헌 조몽정 묘역 이미지
    • 지정번호 : 시향토문화재 제5호
    • 지정일자 : 2002. 12. 16.
    • 명칭 : 경헌 조몽정 묘역
    • 소재지 :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산32
    • 소유자 : 창녕조씨 태복경공파

    조몽정(曺夢禎, 1535~1595)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응길(應吉), 호는 경헌(敬軒)이다. 무과를 거쳐 부사를 지낸 조등(曹璒)의 증손이고, 문과에 합격하여 관찰사를 지낸 조한필(曺漢弼)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문과에 합격하여 호조좌랑을 역임한 조언박(曺彦博)이며, 어머니는 윤유(尹瑠)의 딸이다.
    조몽정은 효성이 지극하여 13세에 부친상을 당했으나 어린 나이에도 묘 아래에 제실을 짓고 3년간 모신 정성을 보였고, 1592(선조 25)년 임진왜란 때에는 사당의 신위를 받들고 피난하면서도 어머니를 위하여 계절에 맞는 음식과 의복을 준비해드리는 등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향시에 응시하여 수차례 선발되었으나 부모와 조상을 공경하기 위하여 관직 등용을 사양했다. 그러나 그의 장남은 형조참판, 차남은 공조 정랑, 막내는 정랑을 지냈다.
    그의 묘역은 석물과 비석 등이 마모 및 파손되어 보존상태가 좋지 못하나 대체로 옛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또한 조선 중기 사대부 묘역임에도 당시 관례로 종2품 이상 당상관에 한하여 건립이 제한된 신도비가 있어 문화재적 연구의 가치가 높다. 특히 신도비 비문은 좌참찬 오덕령(吳德齡)이 찬하고, 전액은 당시 조선을 대표한 서예가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 1542~1621)과 김상용(金尙容)의 문체로 제작되어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시향토문화재/연성군 이곤 묘비
    시향토문화재/연성군 이곤 묘비 이미지
    • 지정번호 : 시향토문화재 제6호
    • 지정일자 : 2004. 10. 25.
    • 명칭 : 연성군 이곤 묘비
    • 소재지 :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553
    • 소유자 : 연안이씨 연성군파 종회

    연성군(延城君) 이곤(李坤, 1462~1524)은 조선 중종(中宗) 대 문신으로서 자는 자정(子靜), 호는 녹창(祿窓)이다. 증이조참의(贈吏曹參議) 이근건(李根健, ?~1456)의 손자이자 연안군(延安君) 이인문(李仁文, 1425~1503)의 아들이다. 1492(성종 23)년 문과 급제 후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1506(중종 1)년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정국공신 4등에 녹훈되고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다. 이후 철원부사와 여주목사를 거쳐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이르렀다. 첨지중추부사, 밀양부사 등을 지냈으며 관압사(管押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봉분 왼쪽에는 방부운수(方趺雲首) 양식의 높이 176㎝의 묘표가 건립되어 있다. 흰색 대리석의 비신높이 90㎝이고, 앞면에 묘에 묻힌 사람의 신원을 쓰고 뒷면에 음기(陰記)를 기록하였는데, 마모가 심한 상태이다. 음기를 짓고 글씨를 쓴 사람은 미상이나 건립 연대는 1559(명종 14)년이며, 손자인 이숙(李俶, 1518~1576)이 선친의 뜻을 받들어 세웠다. 봉분 좌측의 신 묘표는 1981년에 추가 입석한 것이다. 비신과 일체인 높이 48㎝의 운수 전면에는 구름 속에 솟아 있는 둥근 태양 안에 날개를 높이 펴고 비상하는 삼족오(三足烏)의 모습을 장식하였고, 후면에는 운문(雲文)을 역동적으로 조각하였다. 이 같은 양식의 묘표는 성남시에선 이곤 묘표가 유일하며, 전국적으로도 매우 희귀한 비석이다.
    묘역에는 봉분 중앙에 상석, 4각 향로석, 장명등과 좌·우로 신·구 묘표 2기 및 상석 좌우로 문인석을 갖추고 있으나, 문인석(높이 171㎝)을 제외하곤 모두 최근에 추가로 설치한 것이다. 묘역의 좌우에 복두공복(幞頭公服)을 착용한 문인석은 얼굴이 사실적이고 의습선(衣褶線)이 매우 부드러운 양식상의 특징이 있어 16세기 중반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좌측의 경우 안면부에 탄흔으로 인해 파손되었으며, 홀(笏)을 마주 잡은 두 손은 굵은 손가락의 표현이 있다.
    연안이씨 세장 묘역은 15세기 무렵 판교동에 처음 자리한 이후 약 6백여 년간 이어져 내려오다가 판교신도시가 개발되면서 대다수의 묘역이 용인, 제천 등으로 이장되거나 정리되었다. 그 중 이곤 묘와 하단에 있는 아들 이대승과 이공승의 묘만이 유일하게 원형 보존되었다. 2004년 10월 25일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연안이씨 연성군파 종중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시향토문화재 / 광주이씨 묘역
    시향토문화재/광주이씨 묘역 이미지
    • 지정번호 : 시향토문화재 제7호
    • 지정일자 : 2006. 3. 27.
    • 명칭 : 광주이씨 묘역
    • 소재지 :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187-2
    • 소유자 : 광주이씨 대종회

    하대원동 일대 광주이씨 묘역은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자손들 묘역으로 인물들의 사적(史蹟)과 함께 조선 전기 묘역으로써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성남시의 향토유적이다. 묘역 중 하대원동 산3-1번지에는 둔촌의 아들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문하에서 수학한 탄천(炭川) 이지직(李之直, 1354~1419)과 부인 경주이씨, 둔촌의 증손으로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광원군(廣原君) 이극돈(李克墩, 1435~1503)과 그의 아들 감사공(監司公) 이세정(李世貞, 1461~1529)의 묘소가 있다. 하대원동 산7-1번지 외 묘역에는 둔촌의 손자 사인공(舍人公) 이장손(李長孫, 1390~1429), 증손 참의공(參議公) 이극규(李克圭, ?~?), 둔촌의 6대손으로 임진왜란 때 관서부원수(關西副元帥)로서 왜군과 싸운 장렬공(壯烈公) 이윤덕(李潤德, 1529~1611), 둔촌의 8대손으로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낸 후 정묘호란 때 안주성(安州城)에서 전사하여 안주(安州)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된 충민공(忠愍公) 이상안(李尙安, 1575~1627)의 묘소가 있다. 또한 산18번지에는 탄천의 셋째아들인 관찰사공 이예손(李禮孫, ?~1459)의 묘소가 있고, 산33-2번지 일원에는 탄천의 손자이자 관찰사공 이예손의 아들인 참판공(參判公) 이극기(李克基, 1426~1491)의 묘소가 있다.

    시향토문화재 / 신종군 이효백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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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정번호 : 시향토문화재 제8호
    • 지정일자 : 2008. 9. 17.
    • 명칭 : 신종군 이효백 묘역
    • 소재지 :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50-8
    • 소유자 : 전주이씨 덕천군파 신종군 종회

    신종군(新宗君) 이효백(1433~1487)의 묘역은 조선 전기 묘역으로써 역사적 가치를 지닌 성남시의 향토유적이다.
    이효백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희삼(希參)으로, 조선 정종(定宗)의 제10왕자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장남이다. 그는 궁술(弓術)이 비상하여 ‘태조의 신궁’이라고 불렸으며 <조선왕조실록> 에도 궁술에 관한 기록이 여러 차례 있고, 묘역 또한 활과 관련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에 세조의 특명으로 당상관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후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오르고 1467년 신종군(新宗君)에 봉하여졌다. 그 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세조가 친정(親征)하려 할 때 선봉장으로 내정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468년 승헌대부(承憲大夫)에 올랐다. 묘소는 그가 늘 활을 쏘고 사냥하던 곳인데, 하루는 문득 이곳에 작은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사방을 둘러본 후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곳에 장사지내라.”하였다 한다. 또 하루는 활시위를 당기다가 갓끈에 부딪혀 갓끈의 큰 구슬을 잃은 적이 있었는데, 장례 때 광중(壙中)에서 그 구슬이 나왔다고 전해온다.
    묘역은 봉분 높이 240㎝, 직경 550㎝로 배위(配位) 예안현부인 최씨(禮安縣夫人 崔氏)의 묘와 원형의 쌍분으로 용미와 활개를 갖추고 있다. 그 외에 묘표, 상석, 혼유석, 향로석, 장명등, 상석 좌우로 8각 망주석과 문인석 한 쌍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으며 3m의 거리를 두고 2단의 계체석을 두었다. 그 중 묘표는 전·후면에 있고, 전면의 비문은 마모가 심하다. 건립 연대는 1504(연산군 10)년이다. 다수의 석물 중 문인석은 복두(幞頭)에 계란형 얼굴이며 코는 크고 뭉툭하며 옷소매가 길다. 크기는 좌가 203㎝, 우는 194㎝이며, 얼굴 부분은 좌가 64㎝, 우가 58㎝이다.
    묘역에서 묘지석(墓誌石)이 출토되어 현재 경기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1487(성종 18)년에 제작된 것으로 청화백자에 음각하였다. 지석은 모두 6편인데 첫 번째 지석은 분실하였다.

    시향토문화재 / 청주한씨 청연공파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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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정번호 : 시향토문화재 제9호
    • 지정일자 : 2009. 6. 25.
    • 명칭 : 청주한씨 청연공파 묘역
    • 소재지 :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9-1
    • 소유자 : 청주한씨 청연공파 종회

    분당구 율동 도랫말은 관찰사 한혜(韓惠, 1403~1431)의 아들 문정공 한계희(韓繼禧, 1423~1482)의 묘를 쓰고 이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받은 이래로 그 후손이 약 400여 년간 세거하면서 한씨촌을 형성하였다.
    율동 산 9-1에 위치한 성남시 향토유적 청주한씨 청연공파(靑蓮公派) 묘역은 당대 유림들로부터 최고의 문사로서 추앙받고 호당(湖堂)에 뽑힌 청연공 한지원(韓智源, 1514~1561)을 필두로 그의 아들 한술(韓述 1541~1616)과 한회(韓懷, 1550~1621), 그의 손자 한명욱(韓明勗, 1567~1652), 증손 한전(韓甸, 1609~1691), 5대손 한숙(韓肅, 1691~1708) 등을 포함한 6대에 걸친 묘역으로 16~17세기까지 약 2세기 동안 조성되었다.
    묘의 양식에는 부분적 차이가 있으나 조선시대 전형적인 묘제 양식을 보여준다. 특히 문인석의 각 양식들은 조성 시기별로 다양하게 확인되고 있으며, 묘비들의 경우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독특한 서체로 쓰여 있어 사료적·예술적 가치를 함께 지닌 문화유적이다.

    시향토문화재 / 덕수이씨 의정공파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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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정번호 : 시향토문화재 제10호
    • 지정일자 : 2012. 12. 21.
    • 명칭 : 덕수이씨 의정공파 묘역
    • 소재지 :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 555-1
    • 소유자 : 덕수이씨 의정공파 종회

    덕수이씨는 경기도 개풍을 본관으로 한 종중으로서 율곡 이이와 충무공 이순신을 배출한 조선시대 명문가이다. 성씨 중에서는 비교적 늦게 고려 말 시조를 두었으며 후손이 전국에 4만여 명 이내인 가문이나, 중종 대부터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전성기를 이루어 뛰어난 문무관을 고르게 배출하였다. 덕수이씨가 성남시에 정착하게 된 것은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인 해풍군(海豊君) 이함(李菡)이 성남의 고등동 사패지에 부친 풍성군(豊城君) 이의번(李宜蕃)의 묘를 쓰고 세거하면서이다. 이후 이함의 증손자 의정공 이경민 대부터 가문의 번영을 이루어 500년 세거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의정공파 묘역에는 이경민의 할머니 진주 정씨, 아버지 이통, 형 이경안, 계배 성주 이씨, 아들 이래까지 4대로 이어지는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각 묘역에는 17세기 석물 양식인 묘비,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동자석 등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이통(李通) 묘표(墓表)는 이경민이 쓴 것으로 조맹부체를 수용한 점이 특징이다. 1684년 3월에 세워진 이경민 묘 좌측의 묘표 비대(碑臺)는 3가지 문양이 함께 새겨진 희소성 있는 석물로서 이례적으로 귀부(龜趺)가 설치되었으며, 백색 대리석 비신(碑身) 및 일원문 비두 등을 갖춘 매우 우수한 조각에 해당한다. 글씨는 아들인 이유가 썼으며 왕희지체의 필법을 따르고 있다. 이통의 일월문 묘표와 거북 꿈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경민의 운수귀부 묘비는 전통 신앙과 고장의 설화가 연계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례는 전국적으로 극히 드물다.
    성남시는 이통, 이경안, 이경민 묘소를 향토문화재 제10호로 지정하고 인근에 있는 진주 정씨, 성주 이씨, 이직, 이래의 묘소를 보호구역으로 규정하였다.

    시향토문화재 / 판교 백제·고구려 고분군
    시향토문화재/판교 백제․고구려 고분군 이미지
    • 지정번호 : 시향토문화재 제11호
    • 지정일자 : 2012. 12. 21.
    • 명칭 : 판교 백제·고구려 고분군
    • 소재지 : 성남시 분당구 판교로 191
    • 소유자 : 성남시

    판교 삼국시대 횡혈식 석실분 11기는 분당구 판교동과 삼평동 지역에서 각각 발굴되었다. 조성 시기는 4세기 후반∼5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판교동에서 발견된 9기의 한성백제 석실분(石室墳;돌방무덤)은 입구인 연도가 우측에 붙은 점, 동장수법으로 벽석을 올린 점, 변형궁륭형 천장 등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한성백제시기의 묘제 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삼평동에서 발굴된 2기의 고구려 석실분은 축조방식이 고구려의 전통적인 말각조정식 천장(抹角藻井式;모줄임) 천장 양식으로 구안되었다. 특히 1호분의 천장의 구조는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 고구려 고분군과 비슷하며, 판교동에서 발굴된 석실분 중 유일한 쌍실분이다. 2호분에서 보이는 좌편재 관대는 시상대(屍床臺)로서 화성시 동탄면 청계면 고구려 석실분과 상통한다.
    이들 유적은 백제 근초고왕 전후시기의 활발했던 동북아시아 대외 교류 및 고구려 남하의 증거이며, 이후 백제의 웅진(공주)천도로 이어지는 한성백제의 변천 과정을 시사한다.

    시향토문화재 / 판교 통일신라~고려 고분군
    시향토문화재 / 판교 통일신라~고려 고분군 이미지
    • 지정번호 : 시향토문화재 제12호
    • 지정일자 : 2012. 12. 21.
    • 명칭 : 판교 통일신라~고려 고분군
    • 소재지 :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523(낙생대공원 내)
    • 소유자 : 성남시

    판교 통일신라~고려 고분군은 백현동, 삼평동, 사송동 일원에서 발굴되어 낙생대공원으로 이전 복원된 석곽묘(石槨墓), 석실묘(石室墓), 토광묘(土壙墓)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무덤은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 앞트기식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墓),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 등 다양한 묘제 양식을 보인다.
    이중 백현동 고려시대 토광묘는 크게 중앙의 토광묘와 이를 둘러싼 방형 담장(曲墻)시설, 담장 동쪽의 석렬 유구로 형성되어 있는데, 경기도에서는 극히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 또한 삼평동과 사송동 석실묘 등의 통일신라기 유적군은 중원구 도촌동·여수동, 광주 남한산성의 신라 유적들과 연계하여 유추할 경우, 삼국통일시대 한반도 내 성남 지역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성남 지역의 중세 고분 문화를 보여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시향토문화재 / 판교 생활유적군(백제~조선시대)
    시향토문화재/판교 생활유적군(백제~조선시대) 이미지
    • 지정번호 : 시향토문화재 제13호
    • 지정일자 : 2012. 12. 21.
    • 명칭 : 판교 생활유적군(백제~조선시대)
    • 소재지 :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553(판교근린공원 내)
    • 소유자 : 성남시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13호는 백제 집터와 부뚜막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조선시대의 각종 가마와 건물지 등이 판교공원 내로 이전, 복원한 것이다.
    부뚜막은 삼평동 백제 집터에서 발견되었다. 백제 문화가 서울 잠실에서 탄천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는 경로를 밝히는 동시에 당시 성남의 주거 및 식생활을 보여주는 근거 자료로서 의미를 지닌다. 통일신라~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송동 숯가마는 도촌동 숯가마와 함께 과거 성남지역민들의 경제활동을 보여준다.
    운중동 기와가마의 조성 시기는 조선시대로 비정된다. 벽체 구조 분석 결과, 단기간 사용되었으며 한 가마에서 생산 가능한 기와 수를 1,000여 장 가량으로 산출할 경우 대형 건물의 보수를 목적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송동 도기가마는 벽체 구조의 분석을 통해 장기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출토된 대부분의 유물은 지역의 도기(陶器) 생산기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한편, 판교동 담장 건물지는 고려 중기에 조성된 제사 관련 장소로서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당집으로 추측된다.
    각종 가마들과 관련 출토유물은 성남 지역의 경제활동 및 생산기술에 관한 이해 단서를 제시하는 중요한 성남 생활사의 유적군이다.

    시향토문화재 / 평양조씨 석실공 조철산 묘역(平壤趙氏 石室公 趙鐵山 墓域)
    시향토문화재/ 평양조씨 석실공 조철산 묘역 이미지
    • 지정번호 : 시향토문화재 제14호
    • 지정일자 : 2016. 2. 17.
    • 명칭 : 평양조씨 석실공 조철산 묘역
    • 소재지 :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 산 30번지
    • 소유자 : 평양조씨 송산공종회

     조철산(趙鐵山, 1405~1465)의 본관은 평양, 호는 석실(石室)이다. 조철산은 고려 시대 때 원과의 외교로 공을 세운 정숙공 조인규(趙仁規, 1237~1308)의 고손자로, 평양부원군 조덕유(趙德裕, 1314~1352)의 손자이자 고려 말 충신 송산 조견(趙狷, 1351~1425, 참고 : <성남시 향토 문화재> 제3호 송산 조견 묘역)의 둘째 아들이다. 석실공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의 변혁기에 수차례 벼슬을 받았으나, 두 아들 인(軔), 식(軾)과 함께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리하여 석실공 삼대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충절의 역사 인물로 일컬어지며 삼세삼충(三世三忠)이라고 불렸다. 석실공은 사후 의정부 좌찬성의 품계에 올랐다.
      조철산 묘(左)는 부인 인천이씨의 묘(右)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조철산의 묘표는 조선 세조 14년(1468), 인천이씨(仁川李氏, ?~1473)의 묘표는 성종 5년(1474)에 세워진 것으로 세워진 연대가 확실한 성남 지역 내의 묘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묘역은 이외에도 상계의 용미, 사성, 봉분, 상석, 향로석, 계체석, 문인석, 장명등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반적으로 15세기 중반 조선의 전통적인 무덤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 조철산 묘역은 시대성, 희귀성, 예술성, 보존 상태의 측면에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6년 2월 17일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시향토문화재 / 성남 이무술 집터 다지는 소리
    시향토문화재/성남 이무술 집터 다지는 소리 이미지
    • 지정번호 : 시향토문화재 제15호
    • 지정일자 : 2017. 1. 17.
    • 명칭 : 성남 이무술 집터 다지는 소리
    • 소유자 : 성남이무술집터다지는소리보존회

    성남 이무술 집터 다지는 소리는 예전에 이무술 지역이라고 불리던 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옛 돌마면)에서 전해 오는 향토 민속놀이이다. 제목에는 지명이 반영되어 있고, 소리에는 경기 중부 지역 민요 토리*만의 선율이 특색 있게 반영되어 있어 지역성과 향토성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지경 다지는 소리’라고도 불리는 ‘집터 다지는 소리’는 일반적으로 땅의 명기(明氣)를 부르는 소리와 집터의 우수함을 칭송하는 소리로 구성된다. 성남 이무술 집터 다지는 소리는 노동요로서의 특성이 드러나며, 작업을 지시하고 일꾼을 다루는 선소리와 소리·속도를 조절하는 소리, 일의 능률을 향상시키는 일꾼들의 힘찬 뒷소리 등으로 구성된다. 또한 집터를 닦고, 다지고 집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 중 특히 집터를 다질 때 부르는 소리가 특색 있게 잘 발달하였다.
    집터를 다지며 부르는 소리는 단순히 땅을 다지는 노동이 아니라 노동과 소리를 통해 지신(地神)에 대한 공동체의 신앙과 연관되는 행위이자 이매동의 정체성이 담긴 마을 축제이며, 민속 문화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970년대 산업화 이후, 마을 공동체 사람들이 직접 하던 집터 다지기를 건설 중장비가 대신하게 되면서, 집터 다지는 노동의 소리였던 집터 다지는 소리도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성남이무술집터다지는소리보존회’를 중심으로 무형문화재의 보편적인 재주와 기능이 공유되면서부터 1980년대 마을에 실제 거주하던 사람들이 부르는 선소리와 전문학자들의 고증을 바탕으로 완전한 형태의 문화재를 복원하고 전승하는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이 소리는 경기 중부 지역 두레의 기능과 ‘집터 다지는 소리’의 원형미, 형식미와 같은 예술성을 갖추고 있으며 시대성, 지역성과 향토성, 보편성, 특수성, 보전 현황 등의 측면에서 향토사 연구에 대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무형문화재 소리 부문에서 2017년 1월 17일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이 소리를 원형대로 보존하여 실현할 수 있는 단체인 ‘성남이무술집터다지는소리보존회’가 문화재 보유 단체로 인정받았다.

    * 토리: 민요나 무악 따위에서, 지방에 따라 독특하게 구별되는 노래 투

    시향토문화재 / 성남오리뜰농악
    시향토문화재/성남오리뜰농악 이미지
    • 지정번호 : 시향토문화재 제16호
    • 지정일자 : 2017. 1. 17.
    • 명칭 : 성남오리뜰농악
    • 소유자 : 성남오리뜰농악보존회

    성남오리뜰농악은 오리뜰이라고 불리던 지금의 분당구 구미동 일원인 과거 광주군 낙생면 구미리에서 대대로 이어져 오던 농악을 말한다.
    이 농악은 웃다리농악*의 한 갈래로 각 놀이 사이 또는 진풀이**의 각 장단 사이에 삼재비***의 반주에 맞춰 부르는 경기도의 다양한 민요를 말한다. 노동의 고통을 줄여 주고 능률을 높여 주는 노동요의 역할을 하며,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한 마을 단위 조직인 두레농악의 전통을 잘 계승하고 있다.
    이 농악의 특징으로는 경쾌하고 웅장한 사채 가락, 십자진(十字陳), 대자진(大字陳)과 같은 독특한 진풀이, 농사놀이, 육띠기****, 삼재비, 무동놀이 등의 특이한 본래의 놀이 형식과 함께 상모 벙거지의 화려한 금속 장식과 방울 장식 등이 있다. 특히 3부 연창 형식의 사도 소리가 특징인 오리뜰의 들노래(농사짓기 소리)와 거북놀이, 별감놀이, 다리밟기, 줄다리기 등 농업 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두레의 집단 유희도 다른 지역보다 활성화되어 있다.
    성남 오리뜰 농악은 1940년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한국 전쟁의 발발, 급격한 도시화와 분당 신도시 개발에 따라 점차 쇠퇴기를 겪으며 사라질 위기에 놓였었다. 하지만 문화적 가치와 수준을 인정받아 2007년 문화관광부의 <전통 예술 복원 및 재현 사업>에 선정되어 본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어 옛 성남오리뜰농악의 주역이었던 원로와 지역 주민들, 문화재를 원형대로 보존하여 실현할 수 있는 문화재 보유 단체를 중심으로 활발한 전승 활동이 이어져 예전의 명성을 되찾아 가고 있다.
    성남 오리뜰 농악은 시대성, 지역성과 향토성, 보편성, 특수성, 예술성, 보전 현황 등의 측면에서 향토사 연구에 대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무형문화재 농악 부문에서 2017년 1월 17일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성남오리뜰농악보존회’가 문화재 보유 단체로 인정받았다.

    • * 웃다리농악: 충청 지역 일대에서 연희되는 농악
    • ** 진풀이: 농악대가 여러 가지 진(陣)을 짜면서 노는 일
    • *** 삼재비: 장구재비와 피리 부는 사람, 저 부는 사람을 통틀어 이르는 말
    • **** 육띠기: 쇠·징·제금·북·장구·호적 등으로 연주하는 형태
    시향토문화재 / 전주이씨 덕양군파 이순제 묘역
    시향토문화재/전주이씨 덕양군파 이순제 묘역 이미지
    • 지정번호 : 시향토문화재 제17호
    • 지정일자 : 2020. 4. 29.
    • 명칭 : 전주이씨 덕양군파 이순제 묘역
    • 소재지 : 성남시 분당구 동원동 산67-3
    • 소유자 : 전주이씨 덕양군파 참판공종회

    이순제는 성남에서 대대로 살아온 문중 중에서 대표적인 전주 이씨 가문의 인물로, 조선 중종의 왕자 덕양군 이기의 8대손이다. 생전에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장남 동식과 경복궁 중건공사 감독을 한 증손자 주철의 공적으로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무덤에는 이순제와 부인 홍씨가 함께 묻혀 있으며, 그 아래로 장남 이동식과 삼남 이동복의 묘가 차례로 자리 잡았다. 이순제 묘역은 석물을 간소화하고, 석인 대신 석양을 배치하였다. 특히 왕릉에서만 조성되었던 석수(石獸)가 사대부 묘에 유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로 가치가 있으나, 현재의 석양**은 1987년 이후 분실되어 2001년 새로 제작하였다.
    비문은 이순제의 사남 이동선이 썼으며 서체의 예술성이 돋보인다. 내용에는 태장리(胎藏里), 동막동(東幕洞) 등 과거 성남의 지명이 등장한다. 특히 끓는 물에 뛰어들고 불을 밟는다는 뜻의 부탕도화(赴湯蹈火)라는 고사성어를 새겨 공직자로서의 투철한 국가관과 충효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이순제 묘역은 성남 지역의 집성촌과 음택***문화와 관련하여 경기 지역 고유의 묘제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조선 후기 시대성을 반영한 장묘 문화와 지명 자료로 가치가 있다.

    • * 추증: 종이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
    • ** 석양: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 *** 음택: ‘무덤’을 사람 사는 집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만족도 조사

    담당부서 : 교육문화체육국 > 문화예술과 > 종무팀

    문의 : 031-729-3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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