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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동(高登洞)
고등동은 행정동으로서 법정동인 상적동, 둔전동을 통칭한 것이다. 이 지역은 크게 고산동과 등자리로 구분되며, 각 마을의 '고(高)’자와 '등(登)’자를 따서 고등동이 되었다. 고산동의 주막거리는
한국동란 이후 주막거리에 술집이 새로 생겨 새술막이란 이름이 붙었고, 인릉산 밑에 있는 등자리는 덕수이씨 집안에서 과거에 급제하는 경사가 잇따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 능산(陵山)헌인능이 있기 때문에 인능산이라고도 한다.
- 도당재산산신제당이 있던 산. 고등동과 등자리 사이에 위치한다
- 탑산고산골에서 저푸리로 넘어가는데 탑이 있었다하여 그 일대를 탑산이라 한다
- 도당고개고산골에서 등자리로 넘어가는 고개. 산제당이 있어 도당고개라 했다
- 도선이 고개도생이 고개라고도 하는데, 고산골에서 판교·금토동으로 가는 고개. 현재는 고개가 없어졌으나 옛날에는 도적이 많았다
- 계토골서쪽 고산골의 양지쪽 골짜기, 토끼가 많았다고 한다
- 세자골고개고산골에서 금토동으로 가는 고개
- 뒤골등자리 덕수이씨 종산이다
- 문배나무골등자리 오동굴 바로 밑인데 문배나무가 있었다
- 도토목골등자리 덕수이씨 종산을 지나 남동향판의 골짜기
- 세자골고산골에서 금토동으로 가는 골짜기
- 오동골등자리 서북쪽 덕수이씨 산소를 지나 상적동으로 가는 길 위쪽 골짜기
- 음터골고등리 주막거리와 등자리 사이의 골짜기
- 주마터골등자리 남쪽에 위치한 골짜기
- 피란골등자리 뒤골의 서남향파의 산꼭대기. 물은 동으로 흐르고 하늘만 보이는 곳이다
- 등자저수지등자리 뒤의 20년전 이장 이종숙 등 주민들이 설치한 동네 저수지
- 대동우물등자리 162번지에 있던 우물. 길이 나면서 폐정되었다.
- 연내(川)청계산 고산골에서 발원하여 고등동과 시흥동의 경계를 이루는 하천
- 가래들도등동 주막거리에서 동쪽인데 비행장에 편입되었다.
- 대왕(大旺)조선조 태종(太宗)의 능을 대모산(大母山)에 쓰고 대왕(大王)이라 표기하다 가 후에 대왕(大旺)으로 수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 도랑터고산골과 등자리 사이에 있던 산신제 및 도당굿을 하던 곳
- 범바위등자리 뒷산의 큰 바위
- 범바위새술막에 있는 범같이 생긴 바위
- 봉화뚝등자리 마을 뒷산 꼭대기의 봉화 불을 피우던 곳
- 우물터등자리 경주김씨 19대조 묘 옆에 지관이 우물을 파라고 해서 우물을 파고 관리하 다가 자손이 거칠어 역적이 날까 두렵다고 폐정시켰다고 한다.
- 절터등자리 탑산골의 절이 있던 곳. 절에 중이 많아 매일같이 시주를 달라고 하여 마을 사람이 절을 헐어 버렸다고 하며 근래에 마을 사람이 절터에 산소를
쓰려고 광중을 파는데 돌 밑에 금붕어가 보였다. 지관이 파지 말라고 그냥 쓸 수가 없다며 돌을 일구었더니 금붕 어가 죽었다고 전한다.
- 토끼마당고산골 초등학교에서 건너다 보이는 곳
- 하고방게다리 건너 촌락으로 6·25당시 형성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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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토동(金土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대왕면 금토동(金土洞)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현동(金峴洞)과 둔토리(遁土里)를 병합하여 금토리라 하였다. 1971년에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성남시 금토동(金土洞)으로 되고, 1975년 3월 대왕출장소에 편입되어 시흥동의 관할이 되었다. 금토동의 명칭은 금현동(金峴洞)에서 금(金)자를 취하고
둔토리(遁土里)에서 토(土)를 취하여 지어진 명칭이다. 원래 이곳 옛 지명은 월천리(月川里) 또는, 월오천리(月午川里), 월아천리(月兒川里)로 안말의 안동권씨 족보와 금현동의 남원윤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둔토리는 둔퇴(遁退里)라고도 하는데 지명유래는 알 길이 없다.
- 남산금토동 남쪽에 있는 산. 이곳엔 취락이 새로 들어섰다.
- 청계산과천·성남·의왕·서울에 걸쳐 있는 금토동 서북쪽의 산
- 그능고개내동과 외동을 왕래하는 작은 고개. 상여가 넘나들지 못하였다.
- 달래내고개(月峴)금토동에서 말죽거리로 통하는, 옛날 삼남지방 사람들이 한양가던 길 로 지금은 고속도로에 편입되었다.
- 쇠푸니고개(쇠고개)내동(內洞)에서 운중동으로 가는 고개
- 병골병처럼 입구는 좁고 안이 넓어서 붙여진 지명. 내동에서 서쪽으로 가다가 보이는 북 쪽 골짜기
- 두레이골내동에서 서쪽으로 가다가 동남향으로 있는 골짜기
- 진등골내동에서 서쪽으로 가다가 남향으로 위치한 골짜기
- 달래내(月川)청계산에서 발원하여 금토동으로 흐르는 하천
- 옥경동(玉璟洞)청계산 밑 경치가 아름다운 곳, 대원군때 천주교 신도들이 숨어서 살던 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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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대동(丹坮洞)
단대동은 ‘단대리(丹垈里)’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탄리(炭里)’와 함께 개발 이전 성남지역에서 가장 많이 불린 지명이다. 일설에는 1973년 시 승격 당시 탄리에서
남한산성으로 가려면 고개 하나를 넘어야 했는데, 그 고개의 흙이 붉었으므로 단대골, 던데, 단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나, 이미 조선시대 문헌에 단대(丹坮)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 근거는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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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전동(屯田洞)
둔전동은 본래 광주군 대왕면의 지역으로 둔전(屯田)이 있었으므로 둔전말 또는, 둔전촌(屯田村)으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둔전리(屯田里)라 하였으며, 1973년 남시에 편입되고 1975년 대왕출장소에 편입되어 고등동의 관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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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정동(福井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세촌면(細村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마절 (釜谷)·기와골(瓦谷)·안골·응달말을 병합하여 복정리(福井里)라 칭하여 광주군 중부면에 편입되었다. 그후
1971년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입되고, 1973년 7월 성남시 복정동(福井洞)으로 개칭되고 1975년 3월 창곡동을 관할하였다. 그후 1989년 5월 수정구에 편입되었다. 복정동에
명칭은 복우물(福井)에서 유래한다. 구전에 의하면 큰 복우물이 있었던 곳은 현 정수장 뒤인데, 안골로 가는 길, 또는 길과 밭 사이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영장산(靈長山) 복정동쪽 상봉에 있는 칠성대의 감로천(甘露泉)이 복우물이라고도 한다.
- 영장산(靈長山)복정동 남동쪽의 해발 193.5m의 산
- 한이산(寒移山)영장산 낙맥이며 웃말 뒷산으로 수진리 앞산 남씨 묘역에 걸쳐있다.
- 가마절고개안골서 가마절로 왕래하는 고개
- 독쟁이고개가마절과 산성동 신흥주공 아파트 쪽을 왕래하던 고개
- 복고개외국인학교 뒤쪽(산32번지)으로 기와골에서 약진로(창곡동)로 왕래하는 고개
- 세고개(三峴)성남병원 후문쪽의 옛날 길로 복정동과 수진동의 경계가 된다.
- 독골가천대학교 캠퍼스를 말한다.
- 까치골웃말 북쪽, 대유전문대 건너편(前)으로 1975년 김완억(金完億:1936년생)이 율현동에서 이주하여 민가 1세대가 있다.
- 복우물복정동 정수장 뒤에 있었던 우물. 구전에 의하면 정수장 뒤 밭에 큰 기와집이 있었는데 호란 때 금베틀을 우물속에 넣고 피난 갔다가 주인은
생사불명이 되고 나중에 머슴이 이 금베틀을 꺼내려하니 천둥·번개가 쳐서 꺼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 안골우물안골마을 중앙에 있던 동네 우물로 폐정되었다.
- 까치우물까치골 김완억의 집 20m지점의 우물(약수터)
- 향나무우물(아래우물)안골의 대동우물로 수원이 풍부하고 수질이 좋았으며 취락 형성시에 조성되었는데, 우물 주위에 200여 년 된 향나무 두 그루가 있다.
현존하고 있으나 식수로는 사용 불가함.
- 마룻들복우물에 있는 넓은 들(논)
- 범의굴가마절 약수터 위에 있는 바위굴로 호랑이의 서식처였다. 일제 강점기에 호랑이 새끼 네 마리를 마을사람이 가져왔다가 호랑이가 마을에 내려와 헤매고
다녀 혼이 났다고 한다.
- 복정교복정동 사거리에 있는 다리
- 사거리복정동 현 버스정류장 주변
- 시새벌모래가 많은 벌(들)
- 서낭당구석말에서 독골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었는데 가천대 캠퍼스가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 터골복정동 정수장 뒤 집터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 와편과 사기그릇 조각이 출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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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송동(沙松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대왕면 사촌리(沙村里)·송현동(松峴洞) 일부 지역이었는데 1914년 광주군 대왕면 사송리(沙松里)라 칭하였고 1971년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제되었다. 1973년 7월 성남시
사송동(沙松洞)으로 개칭되고 시흥동의 관할이 되었다. 1975년 3월 대왕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5월 수정구에 편입되었다. 사송동의 명칭은 사촌(沙村)의 사(沙)자와
송현동(松峴洞)의 송(松)자를 취합한 이름이다. 그리고 사촌(沙村)은 탄천의 범람으로 마을 주변에 사장(沙場)이 많은데서 붙여진 이름이고, 송현(松峴:솔고개)은 고개에 오래된 소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인데 솔고개 밑이라 솔고개라 하던 것을 송현(松峴)으로 한자 표기화 한 것이다. 일부가 분당지구에 편입되었다.
- 골악산듬박골 앞 야산으로 골이 깊다.
- 등박골산듬박골과 솔고개에 걸쳐있는 산. 정상에 듬바위가 있다.
- 배마산1925년 을축년 홍수 때 배를 맨 산이라 하며 샘골과 둔전동에 걸쳐있다.
- 배밑들산벌말 동북쪽 산인데 배형국이라 하여 배밑들 고개는 배의 중심이라 한다.
- 한감산솔고개 서쪽인데 황씨(黃氏)의 종산이다.
- 궁고개농막의 삼평동 봇들 사이의 농로
- 담뒤고개샘골과 솔개고개 사이에 있는 고개
- 당너머고개듬박골과 솔고개 아랫말 사이의 농로
- 배밑들고개벌말과 동간 사이에 있는 농로
- 샘골고개솔고개와 시흥동 사이를 왕래하는 길인데, 정산에 서낭이 있었다.
- 잿마당고개일명 덤뒤고개인데 샘골과 집너머 사이에 있다.
- 콩배나무고개동간과 사촌사이의 고개로 일대에 콩(팥) 배나무가 많다.
- 가재농(논)골부황대뿌리 밑에 있는 샘이 많은 골로 가재가 많았다.
- 구레골산신터 동쪽 좁은 골짜기
- 군양곡(軍糧谷)큰골 동쪽인데 전란때 군량미(軍糧米)를 쌓았던 곳이다.
- 뱀골벌말 뒤 서편에 있는 뱀처럼 꼬불꼬불하며 좁고 긴 골짜기이다.
- 부처산골듬박골 내령으로 집너머 남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부처가 있었다고 한다.
- 안골사촌 서쪽 농경지였다가 정수장이 설치됐다.
- 삼거리개울운중동과 금토동에서 발원하여 삼평동을 경유하여 중보(中洑)를 거쳐 탄천 교에서 탄천과 합류한다.
- 아랫말 우물아랫말 중앙에 있는 마을 식수로 바가지우물이다.
- 옻우물부황대뿌리 중턱에 있는 옹달샘 우물로 옻오른데 마시거나 씻으면 효과가 있다.
- 용해우물벌말 마을회관 동쪽 10여m 지점에 있다. 용의 입에서 나오는 물처럼 물맛이 좋다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 웃우물(上井)샘골 위에 있는데 약수라고 한다.
- 중보(中洑)탄천 서쪽에 경부고속도로 진입로 밑에 있는 삼거리개울의 보
- 중텃말우물속고개 웃말과 아랫말 사이 마을 중심에 있어 칭한 명칭이다.
- 해남물담귀고개에 있던 우물로 바위속에서 샘이 나며 우물 위에 해나무가 있다.
- 향나무우물솔고개 웃말에 대동우물로 향나무가 있어 향나무우물이라 칭한다.
- 건개들벌말 남쪽으로 큰비가 와야 모를 낼 수 있는 지역이다.
- 낡은터농말과 동간 사이의 길가 구석진 곳에 오래된 집이 있어서 칭하게 되었다.
- 덕마대벌탄천과 동간 사이의 농경지로 일부는 분당지구에 편입되었다.
- 동아다리시흥동과 여수동 경계를 이루는 다리로 다리 밑에 전설이 깃든 안장바위가 있고 탄천이 흐른다.
- 듬바위두엄(듬) 더미처럼 큰 바위로 구전에 의하면 한 장수가 분당동 맹산에 있는 바위를 들고 가다 내려놓은 바위라 한다. 바위에 장수 발자국이 있다고
한다.
- 부황대뿌리동간 동쪽인데 부엉이의 서식처이므로 지어진 명칭이다.
- 산신터벌말과 사촌 주민들이 음력 9월에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다.
- 세수리벌듬박골과 탄천 사이에 있는 들로 버드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 수레나드리들벌말과 탄천 사이의 들로 옛날 보를 막을 때에 수레로 돌을 운반했다하여 지어진 명칭이다.
- 안장바위동아다리 밑에 있는데 일명, 건들바위라 칭한다. 동방삭이를 잡기 위해 옥황 상제가 보낸 사자가 숯을 갈던 곳이라고 한다.
- 용마바위부처산골 아래 탄천에 있다. 바위에 용마 발자국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활터(弓址)사촌 주민들이 활쏘기를 하던 곳으로 사촌 웃말 동쪽에 있었는데 판교-구리 간 고속도로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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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동(山城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세촌면 단대리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단대리(丹垈里)라 하여 중부면에 편입되었다. 1971년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성남시 단대동(丹垈洞)이
되었다. 그 후 1989년 5월에 창곡동의 일부와 단대4동을병합하여 산성동(山城洞)이라 하였다. 산성동의 명칭은 동명 개편시 남한산성(南漢山城) 진입로인 산성로와 접해있어 산성동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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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적동(上笛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대왕면 적동(笛洞)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상동(路上洞)을 병합하여 상적동(上笛洞)이라 하였고 1971년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성남시에 편입되어 상적동(上笛洞)이라 칭하였다. 1975년 3월 대왕출장소에 편입되어 고등동의 관할이 되었다. 상적동의 명칭은 천계산 밑으로 호걸들이 피리를 불며 유람하던 곳이라
하여 적촌(笛村) ·저푸리·적취리라 하였는데 노상동(路上洞)의 상(上)자와 적취리(笛吹里)에서 적(笛)자를 취하여 상적동(上笛洞)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일설에는 덕수이씨네의 등과(登科)로
피리소리가 끊이지 않아서 붙여진 명칭이라고도 한다.
- 까마귀산청계산 낙맥으로 상적2동(삼거리) 앞산이다.
- 인육산(仁陸山)상적동 뒷산
- 박석고개서울과 경계를 이루는 곳인 버스 정류장 사거리를 박석고개라 한다.
- 월현(月峴)일명, 달래내고개라고 하는데 옛날 달맞이하던 고개이다.
- 긴골옛골에서 청계산 골짜기로 가다 중간쯤 남쪽 골짜기
- 뒷골상적동 신구농원 골짜기를 말한다.
- 사태골명성바위 골자기(군용지임)
- 산수골(山水谷)저푸리에서 노상동으로 가는 중간 일대로 용씨 종산이 있다.
- 큰골장수바위 윗 골짜기
- 어둥골옛골에서 서남사이의 골짜기
- 너머우물월현 밑 옹달샘. 물맛이 좋아 삼남지방까지 소문이 나있다.
- 대왕저수지(大旺貯水池)1959년에 준공된 저푸리 앞에 있는 저수지
- 넘말사거리서 동북간 펑퍼짐한 골짜기
- 노루배까막산 아래 길오름이 하천에 있는 넓은 바위로 놀기 좋은 곳
- 도당터저푸리 뒷편으로 마을에서 산신제를 지내던 곳. 큰 고목나무가 고사하였다.
- 망경대(望京臺)청계산 상봉에 큰 바위가 있고 바위 절벽에 옛날 사람들이 글씨를 각자 해 놓았다.
- 명성바위군용지 서쪽 큰 바위. 바위 밑에서 샘이 솟는데 옛날 정성을 드리고 소원 성취를 빌던 곳
- 목정승모이께목배산 장수바위 서쪽 500m 정도에 목씨네 묘 세기가 있었는데, 이 무덤 이 옛골 치소(治所)의 책임자로 추측된다.
- 삼태기안저푸리 북쪽 남향판의 골짜기
- 안터노하동의 옛날 집터로 와편 사기그릇 조각이 출토된다.
- 의골옛골 남쪽 밭으로 고려시대의 행정관청이 자리잡았던 곳이라 한다. 유적이 발견된다. 고려말엽 목씨가 관장하던 관소로 추정된다.
- 장수바위옛골 남서쪽 산에 큰 바위로 장수 발자국이 있다고 한다.
- 황후피난처저푸리 이재복씨 집은 그의 7대조가 지었는데, 건너방에 명성황후가 왜인에 쫓겨 (황후의 올캐친정집) 머물렀다가 용인 용일정씨네로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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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동(壽進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세촌면 수진동(壽進洞)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세오개·새터말·벌터·안말·신답·작은능을 병합하여 수진리(壽進里)라 칭하여 중부면에 편입되었다가
1971년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입되어 중대면에 속했고, 1973년 7월 성남시에 편입되는 동시에 탄동 일부를 병합하여 수진동(壽進洞)이 되었고 1976년 10월 수진1·2동으로 분동되었다. 그
후 1989년 5월 수정구에 편입되었다.동명의 유래는 세종대왕의 7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琳)이 사망하자 영장산(靈長山) 남쪽에 장사지내고 그 묘소를 관리하는 수진궁(壽進宮)을 지었으므로
궁말·궁촌·수진궁·수진동(壽進洞)·수진리라 불리어 왔는데 성남시로 되면서 수진동(壽進洞)으로 되었다.
- 남산(南山)수진골 남쪽에 있는 동산.
- 한이산(寒移山)수진리 서북편 앞산.
- 모란리재향군인 정착지였다.
- 살고개수진동 고개
- 삼현(三峴)새우개, 새오개라고도 하며 복정동쪽에서 모란쪽으로 가자면 고개 셋 (성남병 원 아래, 수진리고개, 성남관광호텔 앞)이 있어서
세고개(三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 아랫터골수진궁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
- 웃터골수진궁 위쪽에 있는 골짜기.
- 지은능수진리 고개에서 서북편으로 건너다 보이는 남경문의 묘를 칭한다.
- 탄천보탄천 옆에 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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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동(始興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대왕면 시흥동(始興洞)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시흥리(始興里)라 하였다. 1971년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성남시에
편입되고, 1975년 대왕출장소에 편입되어 시흥·금토·사송의 3개 동을 합하여 시흥동이 설치되었다. 1989년 5월 수정구에 편입되었다. 시흥동은 원래는 용인(龍仁)에서 말죽거리를 통하여 서울로
가던 길가에 있건 마을 주민들이 청계산(靑係山) 일대에 숨어살던 도적떼의 피해가 극심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처음에는 노변(路邊)에서 이주시킨 마을이라 하여 ‘보낸말'이라
하던 것이 ‘모랜마'로 변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이제부터는 도적의 폐해가 없을 것이니 새로 흥할 수 있는 마을이라 하여 시흥리(始興里)라 하였다가 시흥동으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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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동(新村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대왕면 신촌리(新村里)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에 신촌리(新村里)라 하였고, 1971년 성남출장소에 편제되었고 1973년 7월 성남시 신촌동 오야동 심곡동으로 칭하여
신촌동이 관할하였다가 1975년 3월 대왕출장소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89년 수정구에 편입되었다.신촌동의 유래는 새로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는데, 구전에 의하면 을축년(1925년)
대홍수 이 후 삼전도(三田渡)가 침수된 후에 이곳에서 이주하여 온 수재민들로 이루어진 새마을, 새말 등으로 불리던 것이 한자화 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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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동(新興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세촌동 탄동(炭洞)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남씨편(南氏便)과 독정리(讀亭里)를 병합하여 탄리(炭里)라 칭하고 중부면에 편입되었다가 1971년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입되었고, 다시 1973년 7월 성남시로 승격되면서 탄동의 일부를 갈라서 신흥동(新興洞) 으로 칭하였다. 1975년 10월 신흥1·2동으로 분동되었고 1980년 9월 1일
신흥2동을 갈라서 신흥2·3동으로 개편되었다.신흥동의 명칭은 1973년 시승격 당시 동이 신설되면서 새롭게 부흥하자는 뜻으로 시정자문회의에서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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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곡동(深谷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대왕면 심곡리(深谷里)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심곡리(深谷里)라 하였고, 1971년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제되었으며 1973년 7월 성남시에 편입되어
심곡동(深谷洞)으로 개칭되었다. 1975년 3월 대왕출장소에 편입되어 신촌동의 관할이 되었다. 심곡동은 인능산(仁陵山) 밑 깊은 골짜기가 되므로 깊은 동 또는, 심곡(深谷)이라
하였다가 심곡동(深谷洞)으로 되었다고 한다. · 당뫼산심곡동과 둥자리 사이의 산모퉁이다. 옛날 도당굿하며 제사지내던 곳
- 인능산심곡동 뒷산 안골 뒷산
- 반둥산군인아파트와 저수지 사이의 산
- 봉화뚝산심곡동에서 서북쪽의 산마루턱. 옛날 봉화를 올려 남한산성과 연락하던 곳.
- 쪽박산저수지 옆 둥자골 사이의 산, 쪽박을 엎어놓은 것 같음.
- 산골고개웃말 서남간에 있는 심곡동에서 뒷골로 가는 고개길
- 서울고개마을 서북간에 있는 옛날 서울로 다니던 고개. 고개 너머가 내곡동이다.
- 옴매고개마을 남쪽으로 등자리를 왕래하던 고개
- 장골고개심곡동에서 오야동 장골로 가는 고개
- 깊은골인육산(서북)에서 동남향으로 흐른 골짜기
- 뒷골심곡동 서남간 산너머 골짜기
- 안골저수지 위를 말한다. 일명, 장벌이라고도 한다.
- 약수터심곡동 북서간의 샘터로 바위틈에서 솟아오른다.
- 심곡저수지1943년 설치한 저수지로 군인아파트와 쪽박산 사이에 위치한다.
- 가래들심곡동과 둥자리 경계 지점의 논인데 비행장에 편입되었다.
- 길마바위효성중고등학교 후문 안에 있는 바위
- 도당터마을 서쪽 끝 옛날 도당굿하며 마을 제사지내던 곳. 현재는 공동 수돗물탱크 위 에서 우물고사를 대신 지낸다.
- 둔땅든땅이라고 하며 현관사 자리이다.
- 마루들심곡동 동쪽 비행장에 편입되었다.
- 멍석바위마을남쪽 등성 너머로 응달말 뒷산에 멍석 5-6장 깐 것 같은 넓적한 바위
- 버들섶심곡동 동남간으로 비행장이 편입되었다.
- 비행기바위도당터 위 바위, 비행기 모체를 닮았다.
- 살구논들살구나무가 있었는데 왜인(후리가)이 살던 곳이라 한다.
- 안터장벌에 안홍봉이 살던 집터
- 학두들기들비행장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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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동(陽地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세촌면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다라 은행정이 논골 금광리를 병합하여 단대리(丹垈里)라 하여 중부면에 편입시켰다. 그 후 1971년 성남 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단대동에서 은행정이를 갈라서 은행동을 만들고, 1979년 9월 은행동은 은행1·2동으로 분동되었다. 다시 1988년 7월 다시 은행2동은 은행2·3동으로 분동되고 1989년 5월 은행
3동을 양지동으로 개칭하여 수정구에 편입되었다.양지동은 단대천을 경계로 은행동과 경계를 이루면서 남향판의 양지쪽에 위치하여 양짓말이라 부르던 곳인데 이로 인하여 양지동(陽地洞)으로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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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야동(梧野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대왕면 오야동(梧野洞)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야리(梧野里)라 하였고, 1971년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성남시에 편입되었고
1975년 3월 대왕출장소에 편입되어 신촌동(新村洞)의 관할이 되었다. 오야동의 명칭은 와실(瓦室)·왜실·오야소라고도 하는데 오야리(梧野里)라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야동 명칭의 유래는 예전에
기와를 구웠으므로 와실 또는, 왜실이라 칭하던 것이 오야리로 변했다는 설과 오동나무가 많았으므로 오야소(梧野所)라 했고, 오동나무 열매가 잘 열렸으므로 오야실(梧野實)이라 칭하던 것이
오야리(梧野里)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 뒷메산오야동 뒷산.
- 범바위산장곡 뒷산 100m 정도에 큰 바위가 있는데 나무가 우거져 가리워지면 풍년이 들고, 바위가 드러나면 흉년이 들어 죽을 먹고 살게된다는 바위이다.
- 깊은골고개(장골고개)오야동의 윗고개로 심곡동을 왕래하던 고개.
- 아랫고개오야동의 중간고개로 오야동에서 당아래 황새머리들·미루들을 왕래하던 고 개.
- 새말고개신촌동을 왕래하던 고개. 마을 옆 산의 짤두메기.
- 장골오야동 서쪽에 마을인데 골이 길다.
- 가루갈이들왜실 동남간의 논들
- 가문앞들왜실 동쪽 전답인데 밭이 많다.
- 물쏙논게오야동 동쪽의 논들
- 범바위뒷메산 꼭대기 신촌동 경계점에 있는 바위. 옛날 범이 가끔 나타났다고 한다.
- 장사바위오야동과 십곡동 사이의 바위로 장사의 주먹 자리와 손가락 자리가 있다.
- 황새머리효성중·고등학교 앞 들인데 비행장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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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곡동(倉谷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서부면 창말이었는데, 1914년 광주군 세촌면(細村面)의 세곡동을 병합하여 창곡리라 하고 중부면에 편입되었으며, 1971년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입되고 1973년 성남시에
편입되어 복정동의 관할이 되었다. 그 후 1989년 5월 수정구에 편입되었다. 창곡(倉谷)의 명칭은 첫째, 나라에서 봄에 곡식을 대여해 주고 가을에 이 대여한 곡식을 거두어 보관했던 창고가
있었다는 설. 둘째, 조선조 말기 탄천 일대에서 생산된 군량미(軍糧米) 창고(倉庫)가 있었다는 설. 셋째, 병자호란 당시 군사들이 진을 폈던 곳(軍用地)이며 병기를 저장했던 곳(병기고)라는 설이
있다. 아무튼 위에 세 가지 설에서 공통된 점은 창고라는 것이다. 창고터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명칭이 창말- 창골- 창동 등에서 유래한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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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산창곡3동 앞산이 배같이 생겼다고 하여 칭한 이름이다.
- 병풍산1통 뒷산으로 매착이까지 뻗은 산줄기를 칭한다.
- 안산창말과 세죽골 사이의 산이다.
- 서낭당고개약진로에서 남한산성(성남로)과 산성동으로 갈라지는 지역으로 옛날에는 큰 서낭이 있었음
- 천행이고개매착리에서 매맞고 지나가는데 매맞지 않고 갔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넓은골긴골과 좁은골 중간에 있는 골짜기로 약진로 아래 지하터널 위 조씨종산 일대이다.
- 댕골창말에서 외곡동 가는 길 위를 칭한다.
- 세자골백제시대에 세자궁이 있어서 세자골이라고 한다. 간이골 세자궁 터라는 곳 (밭)에는 와편이 출토되고 있다. 또는 세 집이 살아서 세집골이었는데
세자골로 변했다고도 한다. 이 일대는 전주이씨 사패지로 오씨- 전주이씨가 세거하고 있다.
- 풀무골창말에서 동쪽으로 광산김씨 묘막이 있는 골짜기이다.
- 석양들창말에서 외곡동으로 가는 길 아래들(논)을 서쪽이라 해서 칭한 지명이다.
- 성남로약진로에서 남한산성 가는 길인데 자유당 때 이대통령이 산성에 가느라 닦았기 때문에 이박사의 호를 따서 우남로라고도 했다.
- 숲펑창말 아펭 오리나무들을 방풍림으로 심었는데 이를 칭한다. 숲 위를 숲안이라고 한다.
- 약진로창곡동과 복정동 사이의 도로로, 옛날 단대동 방향에서 서울 왕래할 때 다니던 길이다.
- 진터벌행정학교-상무체육관 자리인데 호란때 청군이 진을 쳤었던 곳이라 한다.
- 창위창말 창고터 위를 칭하는 말이다.
- 창터호란때 병기를 보관했던 창고터, 또는, 군량미를 보관했던 창고터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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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동(太平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세촌면 탄동(炭洞)이었던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남씨편(南氏便)을 합쳐서 탄리(炭里)라 칭하고 중부면에 편입되었다가 1971년 성남출장소 중대면에 편입되었고
1973년 7월 성남출장소 수진지소(壽進支所)와 탄리 일부를 병합하여 태평동(太平洞) 이라 개칭하였다. 1975년 10월 태평1·2동으로 분동하고 1980년 9월 태평1동을 갈라서
태평1·3동으로 하였다. 1989년 5월 수정구에 편입되고 1990년 1월 태평2동을 태평2·4동으로 분동하였다.태평동 동명의 유래는 동 창설시 성남시청 자문회의에서 근심 걱정이 없는 태평한
지역을 만들자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